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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이만도(李晩燾, 1842~1910)는 이황의 후손으로 조선 말기의 학자이자 관료이며, 1910년 한일합병에 항거하여 단식 순국한 인물이다. 이만도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관직생활을 그만두고 낙향한 이후의 구국활동과 자정순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순국의 배경에 대해 고찰하는 과정에서 그의 가계와 학문적 배경, 관직생활 등에 대해서 다뤄지고 있다. 한편 이만도의 경세론에 대한 연구는 이를 살필 수 있는 사료가 적은 편이라 연구가 되어 있지 않다. 이만도는 생부인 이휘준과 족형 이만각(李晩慤), 처가의 권승하와 권연하(權璉夏)에게서 수학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만도의 학문에 영향을 끼친 사람은 이만각이다. 이만각은 조부 이태순(李泰淳)과 외숙인 유치명(柳致明)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문장과 시는 이야순(李野淳1)과 이가순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이만도는 권승하와 권연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권승하와 권연하는 안동권씨(安東權氏) 권벌(權橃)의 후손으로 유치명의 문인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만도의 학문적인 배경으로 퇴계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가학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만각이나 권연하 등 이만도에게 학문적인 영향을 준 이들이 대부분 유치명의 문인인 것으로 보아 유치명과 정재학파의 학문적인 영향도 받았을 것이다. 876년(고종 13) 이만도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직을 주로 역임하였으며, 그중에서도 홍문관 관원으로서 재임한 것이 가장 많다. 이에 이만도는 고종 초기 경연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만도는 주로 『맹자』를 진강하였으며, 소대에서는 『자치통감』을 진강하였다. 이만도가 강조하는 것은 군주의 중요성, 그리고 정학(正學)이었다. 즉 『맹자』에 따라 요순의 도가 인의(仁義)에 지나지 않으며, 위에서 인의를 좋아하여야 아래에서 인의를 좋아함을 언급하면서 국왕의 역할을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또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비판하면서 유학을 숭상하고 정도(正道)를 중시하여 선왕의 옛 법도를 회복하여 객사(客邪, 동학)가 침범하지 말게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만도는 사술(邪術)을 배척하기 위해서는 정학(正學)을 숭상해야 하고, 정학을 숭상하기 위해서는 유현을 존숭해야 하고 유현을 존숭하기 위해서는 훼철한 서원을 복원해야 한다고 하였다. 서원을 없애게 되면 인의와 도덕의 설을 들을 곳이 없어져서 결국 사설(邪說)에 빠질 것이라고 하였다. 이만도는 사설(邪說)에 빠지는 것은 곧 객병(客病), 객사(客邪)가 침해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곧 동학(東學)을 말한다. 당시 유학자들은 유학에서 말하는 정(正)과 사(邪)의 논리에 따라 동학을 사(邪)로 규정하였으며, 동학이 지닌 기복적 요소에 미신적 요소 등을 비판하였다. 이만도 역시 당시 경북지역 유학자들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식을 보여주며, 동학을 저지하기 위해서 서원의 복설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키워드
- 제목
- 이만도(李晩燾, 1842~1910)의 관직 활동과 서원 복설 건의
- 제목 (타언어)
- Yi, Man-Do(李晩燾, 1842~1910)’s government service activities and Proposal for the Restoration Seowon(書院)
- 저자
- 이인복
- 발행일
- 2024-11
- 유형
- Y
- 저널명
- 대구사학
- 권
- 157
- 페이지
- 77 ~ 108
- 언어
- KOR
- 출판사
- 대구사학회
- 발행국가
- 대한민국
- 분량
- 32 페이지
- ISSN
- P 1225-9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