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토 문자로 본 ‘옥저’ -‘夭租’에서 ‘沃沮’로-

“Okzer(沃沮)” from excavated texts: From Yaozo(夭租) to Okzer
  • 윤용구

초록

‘옥저’의 한군현 시기 명칭은 ‘夫租’이며 이후 ‘沃沮’로 변화한 것으로 여겨왔다. 『漢書』 지리지의 낙랑군 소속 현명에 ‘夫租’가 ‘옥저’에 해당하며, 평양의 樂浪故地에서 출토된 「夫租丞 印」 봉니와 「夫租薉君」 인장의 존재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잊혀진 연구가 되었지만, 당초에는 『한서』 지리지의 ‘夫租’는 옥저로 혹은 ‘沃沮’의 誤記 라 여겨왔다. 특히 1917년 재발견된 唐鈔本(660) 『翰苑』의 〈한서ㆍ지리지〉에 「夭祖」 로 표기된 것을 근거로 ‘夫租’의 ‘夫’는 ‘夭’의 誤記로 보는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다. 1936년 「夫租 丞印」 봉니 그리고 1958년 「夫租薉君」 인장의 출토로 인해 현재와 같이 ‘夫租’에서 ‘沃沮’ 로의 변화가 일반적인 견해가 된것이다. 1986년 ‘夫租薉君’ 인장의 ‘夫’字는 ‘夭’의 隸書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金元龍의 제안을시작으로 1999년 林沄은 金文과 戰國時代 簡牘帛書에서 ‘夭’字의 자형과 그 변화를 통해 ‘夫 租’ 銘 봉니( )와 인장( )의 자형은 ‘夭(宎)’의 약자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이는 甲骨文을비롯하여 金文ㆍ璽印封泥ㆍ簡牘帛書 등 광범위한 출토 문자에 의한 연구의 산물이다. 문자학적으로 다시 ‘夫租’로 回歸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에 따라 ‘沃沮’는 ‘夫租’가 아니라 ‘夭租’에서 변화되었으며 그 시기는 후한대로 추정하였다. 후한말 服虔( ~192)의 『漢書』 注文에 처음 보이고, 王莽代(기원 9~23)까지 상황을 보여주는 『한서』 지리지에 ‘夭祖’(夫租)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夭租縣을 포함한 낙랑군 소속 현의 명칭에는 변동이 적지 않았다. 部首字의 첨삭, 聲旁의자형 축소를 통해 정제된 한식 지명처럼 미화하거나, 자기 정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이었다. 그 시기는 대체로 낙랑군 東部都尉를 폐지(기원 30년)하고 토착 渠帥로 하여금 縣侯를 삼아侯國 체제로 전환된 뒤였다. ‘夭租’에서 바뀐 ‘沃沮’에는 “비옥하고 바다로 가로막힌 지역의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夭租’에서 ‘沃沮’로의 변화는 侯國으로 전환된 후 독립된정치체를 지향하던 시기의 산물이라 생각된다.

키워드

沃沮; 夭租; 夫租; 林沄; 訛字; Key-words:“Okzer(沃沮)’; ‘Buzo(夫租)’; ‘Yaozo(夭租)’; Limyun(林沄); False words(訛字)
제목
출토 문자로 본 ‘옥저’ -‘夭租’에서 ‘沃沮’로-
제목 (타언어)
“Okzer(沃沮)” from excavated texts: From Yaozo(夭租) to Okzer
저자
윤용구
DOI
10.37331/JKAH.2024.09.115.289
발행일
2024-09
유형
Y
저널명
한국고대사연구
호
115
페이지
289 ~ 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