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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경상북도 영일지역은 1895년 지방관제 개편으로 연일군, 흥해군, 청하군, 장기군으로 개편되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지방관제 조정으로 통합되어 영일군이 되었다. 3․1운동이후 영일지역의 청년들도 각 면지역을 중심으로 청년단체를 설립하였다. 포항면의 영일청년회, 청하면의 청하청년회, 송라면의 송라청년회, 흥해면의 흥해청년회 등을 설립하였고, 이러한 청년단체들은 이후 영일지역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대부터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전국의 청년단체들이 혁신을 통해 조직체를 변경한다. 전국적 청년단체의 혁신은 영일지역의 청년회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혁신과 더불어 지역 청년단체 연합체 구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영일지역에서는 10 여 개의 청년단체들이 모여 영일청년연맹을 설립한다. 이후 영일청년연맹은 1927년, 청년운동이 민족주의․사회주의 양 진영의 통일전선체 구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또 다른 변화를 겪게 된다. 민족통일전선운동으로 방향전환 한 청년회들은 더욱 더 조직화 되어 一郡 一靑年會라는 목적아래 각 府․郡에 있는 청년회 및 청년연맹을 자진 해체하고, 대신 각 府․郡 청년동맹을, 그리고 각 面에는 동맹지회를 결성하여 나갔다. 영일청년연맹 역시 이러한 통일전선체 구성을 통해 영일청년동맹으로 변화․발전하게 된다. 또한 정학선․이재우 등이 주도하여 설립한 사상단체 ‘四月會’를 해체하고, 신간회 영일(포항)지회 설립하였다. 영일지역의 청년들은 영일청년동맹 활동과 신간회 영일(포항)지회와의 연대활동을 통해 민족의 이익 옹호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1929년 말에서 1930년대 초까지 일어난 조선공산당사건, 조선공산당 재건위 사건은 신간회 각 지회와 청년단체에 있어서 큰 타격이 되었다. 이 사건들로 인해 신간회 각 지회 간부들이 대거 연행이 되고, 이들이 속한 단체들은 강제 해산되거나,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영일지역에서도 조선공산당사건은 지역의 청년운동이 위축되는 계기가 되었다. 경상북도 영일지역의 민족운동과 청년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들과 포항교회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주도하였다. 하지만 이들을 제외한 새로운 민중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내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특히, 지역 운동을 주도하였던 사회주의 계열 청년들이 일제에 의해 검거된 이후, 청년단체 뿐만아니라 노동조합, 형평사, 어업조합 등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거나 와해되면서 지역적 민족운동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일지역 청년운동은 많은 청년들을 지역의 민족운동의 선도자적 위치로 이끌었다. 또한 사회주의자들과 기독교계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이념적․사상적 분화를 뛰어 넘어, 영일청년연맹․신간회영일(포항)지회․영일청년동맹 등 단일한 민족운동 세력을 형성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이러한 점은 영일지역에서도 청년들이 1920~30년대 청년회 활동과 해방 이전까지 일제에 대해 끊임없이 항거하고 전민족적 활동을 이어왔다는데 그 의의와 영향은 지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키워드
- 제목
- 1920년대 경상북도 영일지역의 청년운동
- 제목 (타언어)
- Yeongil Youth Movement in Gyeongsangbuk-do in the 1920s
- 저자
- 최용석
- 발행일
- 2022-02
- 유형
- Y
- 저널명
- 대구사학
- 권
- 146
- 페이지
- 239 ~ 282
- 언어
- KOR
- 출판사
- 대구사학회
- 발행국가
- 대한민국
- 분량
- 44 페이지
- ISSN
- P 1225-9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