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更相攻伐’의 사회사 - 1세기 낙랑군 ‘嶺東七縣’의 사례 -

A social history of mutual attacks and continued conquests -The case of “Lingdong Qīxiàn”(嶺東七縣) in Lolang County in the 1st century-
  • 尹龍九

초록

본고는 기원 1세기 초 낙랑군의 ‘嶺東七縣’에서 동부도위가 철수하고 고구려에 의한 침탈이 본격화되는 2세기 말까지 ‘更相攻伐’로 표현된 혼란 속에서 이 지역 주민과 정치체의 선택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更相攻伐”의 시기 ‘영동칠현’의 주민과 정치체가 보여주는 모습은 다양하였다. 『삼국사기』는 기원 37년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로 대표되는 ‘樂浪國’, 기원 56년 동옥저 정벌로 고구려의 옥저 지배를 명시하였다. 반면 『후한서』 등 중국 기록에는 고구려에 신속 되었다 기원 47년 다시 낙랑군으로 투항한 ‘濊蠶台國’, 기원 100년 전후까지 중국 내지와 해산물을 교역하던 ‘濊邪頭國’의 존재, 그리고 118년 여전히 고구려의 침탈을 받고 있던 ‘濊華麗國’이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후한말 濊 지역 또한 모두 고구려에 신속하였다. 이처럼 2세기 후엽 ‘영동칠현’ 지역이 고구려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들어가면서 서남쪽으로 낙랑군과 대방군을 압박하자 옥저와 동예는 물론 單單大嶺 서쪽 嶺西濊의 주민들까지 韓의 북부 지역으로 分散되었다. 이때 군현민의 대량 유출 사태에 따라 韓地로 들어간 주민을 『삼국지』 한전에는 ‘韓濊’로 표현하였다. ‘韓濊’는 ‘韓地 내의 濊’로 이해하였다. ‘濊民’이 유입된 지역은 韓의 북부에서 郡縣 故地 사이로, 2세기 후반에 이르러 낙랑군 남부지역의 荒地化가 진행되면서 형성된 넓은 空閑地였다. 그 남쪽 지역은 과거 진번군의 廢縣 8곳과 중첩된 지역이고, 북한강 상류는 옛 임둔군 고지와 닿아있다. 이런 이유로 경기 북부와 북한강 상류는 ‘韓濊之地’로 불리게 되었다. 6세기 중엽 신라의 북상은 동해안을 따라 沃沮와 東濊故地에 이르렀고, 남한강 상류를 거쳐 한강 유역 곧, ‘韓濊之地’를 영역화하였다. ‘韓濊之地’는 ‘영동칠현’에서 일어난 ‘夷狄更相攻伐’의 결과 분산된 沃沮와 濊의 주민이 남긴 마지막 모습이었다.

키워드

嶺東七縣; 東部都尉; ‘更相攻伐’; 韓濊; 韓濊之地; “Lingdong Qīxiàn(嶺東七縣)”; mutual attacks and continued conquests(更相攻伐)’; Okzer(沃沮); Han-ye(韓濊); Han-yei land(韓濊之地)
제목
‘更相攻伐’의 사회사 - 1세기 낙랑군 ‘嶺東七縣’의 사례 -
제목 (타언어)
A social history of mutual attacks and continued conquests -The case of “Lingdong Qīxiàn”(嶺東七縣) in Lolang County in the 1st century-
저자
尹龍九
발행일
2024-12
유형
Y
저널명
진단학보
호
143
페이지
1 ~ 22